10억이 넘는 인구, 신비함으로 가득 찬 신들의 나라, BRICs(Brazil, Russia, India, China)의 일원으로 떠오르는 신흥 산업강국, 수학적인 두뇌와 뛰어난 정보통신기술, 핵무기를 보유한 군사대국, 국제사회에서의 높은 발언권,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민주주의 국가.
* 갠지스강
인도를 설명하는 말들이다. 그 뿐인가. 갠지즈강, 요가, 고행, 설산. 석가모니, 타지마할 등등. 인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도 다양하다.
그리고 인도에는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카스트제도가 있다는 것은 중•고등학교 사회시간에 배운 내용이다. 카스트제도는 사제계급인 브라만, 전사계급인 크샤트리아, 상업계급인 바이샤, 노동계급인 수드라가 있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 4개의 카스트가 다시 삼천여개의 작은 카스트로 나누어지고 그 밑에는 카스트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 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불가촉천민, 말 그대로 너무나 더럽고 천해서 손댈 수도 없다는 이들의 숫자는 인도전체 인구의 25%에 달한다.
지난 9월말 인도 최대신문인 Times of India에 실린 기사가 눈을 끌었다. 사실 인도사회에서는 그다지 특이하다고 할 사건도 아니었지만, 우리의 눈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 사슬에 묶인 우펜드라
인도에서도 비교적 낙후된 지역인 오릿사주의 켄드라파라 라는 도시에 한 청년이 2년 넘게 자기 집에 쇠사슬로 묶여 있다는 것이었다. 부인은 남편을 풀어달라고 경찰, 관청, 마을원로 등에 호소하다 지쳐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고 연로한 아버지가 하루 세끼 먹을 것을 해서 아들을 챙겨 먹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2년 넘게 쇠사슬에 묶여 있는 이유가 불가촉천민인 그가 마을의 힌두사원에 있는 삼지창을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의 이유로, 그렇게 오랜 세월을, 재판도 없이 그냥 쇠사슬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인도로 갔다.
델리에서 오릿사주의 주도인 브바네스와르로 가는 비행기는 하루에 한 편밖에 없는데, 마침 인도 공군이 국군의 날 행사를 앞두고 시범비행 연습을 한다고 활주로를 차지하고 있어서 비행기는 예정보다 5시간 늦게 이륙했다. 인도사람 중에 항의를 하거나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이 내용을 처음 보도했던 아쉬이 세나파티 기자와 함께 현장을 찾았다.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보도되었던 청년의 이름은 우펜드라 나이크. 켄드라파라의 저지대 불가촉천민 집단 주거지역에 산다고 했다.
* 우펜드라가 사는 마을
인구 7만정도의 농업지역인 켄드라파라에서 200여가구의 불가촉천민이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불가촉천민 주거지역은 강 옆으로 나란히 가는 비포장도로에서 갈비뼈처럼 옆으로 갈라진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게 되어있었다. 골목길은 이틀 전에 내린 비로 물바다를 이루고 있었고 신발을 신지 않은 아이들과 끈이 성하지 않은 샌들을 신은 어른들이 첨벙대며 다니고 있었다. 골목을 따라 문을 내 집들 중에는 물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게 모래주머니를 앞에 쌓아 놓은 집도 있었다.
마을의 집들은 모두 어두컴컴해서 방안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이지 않았고 마을 한가운데로는 시멘트로 둑을 만든 폭 50cm정도의 개천이 지나고, 반은 쓰레기가 채우고 있는 그 개천가에서 사람들은 양치질을 하기도 하고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우펜드라 나이크의 집으로 갔다.
좁은 집 마당에는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있고 우펜드라의 늙은 이모가 마당 한가운데의 조그만 화덕위에 양은 솥뚜껑을 얹어 ‘난’이라고 부르는 전통적인 밀부침을 부쳐 아이들에게 팔고 있었다. 우펜드라는 물론 그의 부모도 집에 없었다.
다행히 우펜드라의 동생이 있었다. 형은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보니 이틀 전에 정신병원으로 갔다고 했다.
형이 묶여 있다는 기사가 나간 후 인도의 여러 언론사에서 취재를 왔었는데, 그러자 그 동안 전혀 관심이 없던 마을의 행정관이 형을 쿠탁이라는 인근 도시의 정신병원으로 보냈다는 것이었다.
취재진 주위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을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우펜드라가 천민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했다며 자신들이 단지 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목청을 높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펜드라가 쇠사슬로 묶이는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마을의 힌두사원을 가보았다. 마을 중심지 도로변의 높지 않은 담장너머로 신도들이 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갔다. 사원은 생각보다 작았다. 3평정도 되는, 시멘트로 땅바닥보다 약간 높여 놓은 사각형바닥 가운데에는 사람 머리통만한 크기의 황소가 높여져 있고, 신도들이 황소 주위에서 절을 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단과 이어진 내실 안에는 벽에 시바신과 부인의 그림이 걸려있고 브라만 사제가 꽃과 물을 가지고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구석에 금빛 삼지창이 있었다. 트리슐이라고 부르는 이 삼지창은 힌두교에서는 신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가촉천민인 우펜드라가 사원에 들어와 그 삼지창을 만졌다는 것이다.
* 켄드라파라의 힌두사원
* 힌두사원의 브라만 승려
* 우펜드라가 만진 삼지창
원래 힌두사원은 카스트계급이 들어가는 곳과 불가촉천민용이 따로 있다. 불가촉천민도 힌두교도이기는 하지만 카스트들과 함께 같은 사원을 사용하지는 못한다. 불가촉천민은 카스트와 함께 자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펜드라는 카스트계급이 다니는 사원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브라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내실까지 들어가 삼지창에 손을 댔다는 것이다. 물론 우펜드라는 현장에서 잡혔고, 마을회의는 우펜드라가 더 이상 함부로 마을을 돌아다니지 못하게 묶어두라는 명령을 부모에게 내렸다.
이 사원의 사제 구마르뽄다는 이런 결정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또 불가촉천민이 사원을 더럽혔기 때문에 정화의식을 치르기 위해 많은 돈이 들었다고도 했다.
만일 불가촉천민이 아니라 카스트계급이 이런 일을 했어도 똑같은 결정이 내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니 그들은 현명하기 때문에 아예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인도에서 마을회의의 결정은 절대적이다. 빤짜야트라고 부르는 마을회의에서의 결정은 행정력이나 사법권보다는 구속력이 강하다. 특히 시골지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우펜드라의 부모는 울면서 아들을 묶을 수밖에 없었고, 그 후 마을원로나 행정관, 경찰에 수도 없이 탄원했지만 아무도 신경써주는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풀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천민들에 대한 멸시와 차별구조를 이해하려면 인도인구의 90%이상이 믿고 있는 힌두교를 이해해야한다. 힌두교는 현세를 어떻게 사느냐가 내세에 무엇으로 태어나는지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브라만들은 전생의 삶에서 선업을 많이 쌓아서 브라만으로 태어난 것이고 천민은 전생의 악업을 천민으로 고통스럽게 살면서 현생에서 갚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결국 현세의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선하게 살면 다음 생에 높은 신분으로 태어날 수 있으니 참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출생신분이 직업을 결정하기 때문에 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있다. 빨래, 화장터의 작업, 동물의 시체를 치우고, 가죽을 벗기는 일등이 모두 천민의 일이다.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더럽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악기를 부는 일도 역시 천민의 일이다. 그중에서도 천민중의 천민이 하는 일은 화장실 청소이다. 노천 재래식 화장실의 인분을 치우는 일이다. 이들은 수세식화장실의 정화조 속을 맨몸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많은 천민들이 이 과정에서 유독가스에 질식되어 죽기도 했다.
* 잠수해서 정화조를 청소하는 달리트
이들에게는 금지된 일도 많다. 천민들은 카스트계급과 한자리에 앉을 수도 없다. 같은 우물을 사용할 수도 없다. 죽은 뒤에도 화장터를 함께 사용하지 못한다. 카스트계급 앞에서는 머리도 빗지 못한다. 신발도 신지 못한다. 카스트 계급은 절대로 천민과 같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찻집에서도 천민에게는 차를 팔지 않는다. 천민이 마신 찻잔은 카스트가 사용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스트계급은 천민이 주는 것은 물 한잔도 마시지 않으니 천민과 카스트 계급과의 결혼은 상상할 수도 없다.
이런 금기를 깰 경우에는 보복을 강요해야 한다.
인도의 언론에는 이런 보도가 끊이지 않는다.
* 살해당한 달리트 지도자
달리트 소년이 브라만 소녀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달리트 소년의 아버지가 살해를 당하고 달리트의 권리를 주장하는 달리트지도자가 살해당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오리사주의 통계만 보더라도 지난 4년간 달리트에 대한 폭력이 3990건이나 보고되었지만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바이샤계급이었던 마하트마 간디는 불가촉천민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해 그들을 신의 아이들이라는 뜻으로 하리잔이라고 불렸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천민들은 같은 천민으로 인도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암베드카를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었다. 암베드카는 수만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계급차별이 없는 불교로 개종하기도 했고 천민들의 권리향상을 위해 평생 노력했다. 그 후 천민들은 자신들을 억압받는 사람들이란 뜻의 ‘달리트’라고 불렀다.
달리트 인권운동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느리다.
취재팀이 인도에 있는 동안 나싱푸르라는 마을에서는 심지어 달리트가 마을에서 자전거 타는 것을 금지당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전체 200가구 정도 되는 나싱푸르라는 마을은 전형적인 인도마을의 구조를 하고 있었다. 마을 가운데로 길이 있어 양쪽으로 카스트계급이 사는 집들이 늘어서 있고 카스트계급이 사용하는 공동우물 2개가 거리를 두고 양쪽에 있었다. 마을이 끝난 곳에서 다시 100여 미터를 가면 15가구가 사는 달리트 마을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부유한 마을은 아니지만 달리트 마을은 한눈에 보기에도 카스트마을과는 달리 빈곤에 절은 티가 났다.
* 빨래하는 달리트
낮은 초가지붕에 널려있는 빨래들과 움막같은 집들, 비쩍 마른 주민들의 모습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하루 3끼를 먹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 모모따 나약
그런데 이 마을에 사는 모모따 나약이라는 소녀가 대학에 합격을 했다. 소녀의 아버지는 첫째 딸을 일찍 사별한 후 둘째에게 모든 정성을 쏟았다고 했다. 그런데 대학은 집에서 7Km이상 떨어져 있었고 모모따는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했다고 한다. 학교를 가자면 카스트지역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는데 카스트사람들은 자전거를 가지고 마을을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학교까지 걸어다니라는 말이었다. 달리트들은 달리트가 대학에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카스트계급의 억지라고 행정관서에 청원을 했고 지방정부가 개입해 모모따는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일로 보복을 당해야만 했다.
카스트들이 달리트들에게 일감을 주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빈곤한 달리트들은 땅이 없으니 소작을 부치거나 카스트계급의 빨래, 집안청소 등을 해주며 선심쓰 듯 조금씩 주는 곡식을 얻어 먹고 사는데 일감이 다 떨어진 것이다. 또 마을 사람들은 달리트에게 말을 걸기만 해도 1000루피의 벌금을 내야한다는 규칙을 정했다고 한다. 달리트들은 길이 없는 무논을 걸어 이웃마을에 가서 일을 해주며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취재진이 마을에서 취재를 하고 있는 동안 카스크들의 시선은 몹시 싸늘했고 달리트들은 혹시라도 자신들이 취재건으로 또 불이익을 당할까봐 불안해 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경찰이 왔다. 경찰은 무엇을 취재하는지 이것저것 캐묻고는 자신이 마을대표를 인터뷰하게 연결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의 브라만 원로를 소개해 주었다. 베룰라라는 원로 브라만은 달리트들의 주장을 모두 부인했다. 마을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라며 아무도 마을도로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는 순간에도 카스트계급은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
모모따가 자전거타는 장면을 촬영하기위해 모모따에게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지나가자고 요청했다. 모모따는 완강히 거부했고 마을 사람들도 모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안된다고 했다. 다른 달리트들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의 달리트들도 카스트계급사람들에게 기가 죽어 있었고 감히 그들의 지시를 거부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뚜이나 나이크라는 이 마을 달리트는 자신들은 어느 면에서도 카스트에 뒤지는 것이 없는데 왜 이런 차별을 받아야 하느냐며 눈물이 글썽해지기도 했다. 별로 자신들에게 도움될 것이 없는 한국에서 온 취재진에게라도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에 감격한 듯 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면 구타를 당해야하느냐며 격앙되기도 했다.
인도 헌법은 1947년 독립 당시부터 불가촉천민제도 폐지를 명문화했다.
인도 헌법 제17조는 ‘불가촉천민제도는 폐지하고 이와 관련된 모든 관행은 금지된다’ 고 명시했다. 또 1980년대부터는 달리트에 대한 우대정책을 실시하고 있고 1998년에는 국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에 달리트가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관습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달리트 인권 운동가들은 성공하는 달리트를 1-2%의 성공이라고 부른다. 성공하는 달리트도 있지만 98%의 달리트는 여전히 차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책적으로 달리트를 우대한다고 하더라도 애초부터 교육받을 기회의 불평등 때문에 우대정책의 해당자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수도 델리에서 만난 달리트 출신의 우마칸트박사는 이런 현실을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섞여사는 도시에서는 자신이 달리트라는 것을 숨기고 살 수도 있지만 알아내려고만 하면 누가 달리트인지 금방 알 수 있다고 했다. 인도인들끼리는 이름만 들어도 누가 달리트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크, 베헤라, 고차이트, 말리크, 세티 등 의 성씨는 그 이름의 주인이 달리트라는 것을 바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까지 바꾸었다는 우마칸트박사는 그래도 20분만 이야기해보면 누가 달리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어디서 살았는지’, ‘아버지, 할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등만 물어보면 달리트여부는 바로 알려진다고 한다. 직업이 계급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자신은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다들 달리트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달리트라는 것을 알게 되면 주위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 친구, 알고보니 달리트라네. 이 친구는 우리가 누리는 이런 것들은 누릴 자격이 없어”라고...
근대화, 공업화속에 도시에는 경제적으로 넉넉해진 달리트들도 많아졌다.
델리인근의 고하나라는 마을에서는 달리트들이 가장 부유한 층에 속하는 계층이 되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2005년 8월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바이샤와 수드라의 중간쯤 되는 자트족 1500여명이 달리트들의 집에 집단으로 방화를 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간단했다. 자트족이 운영하는 사진관에 달리트가 사진을 찍으러 갔고 가격을 흥정하다가 자트족이 달리트에게 ‘아내를 빌려주면 돈을 깍아주겠다’고 하자 모욕을 당한 달리트가 다른 달리트들과 함께 사진관주인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발생하자 자트족 1500여명이 대낮에 몰려다니며 달리트의 집 150여채 가운데 60여채를 불태워버렸다. 자트족은 달리트의 집중에서 부유한 집부터 불을 질렀다고 한다. 또 방화에 앞서 경찰이 달리트들 집을 돌아다니며 위험하니 모두 대피하라고 해서 달리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달리트들은 평소 자신들이 잘 사는 것을 못마땅해 하던 자트족들이 화풀이를 한 것이라고 했고 한통속인 경찰이 자트족의 방화를 방조했다며 분노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방화현장이 TV에서 생중계될 정도로 큰 사건이었고, 더구나 방화주동자가 현직 국회의원의 아들이어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살인사건을 저지른 달리트는 구속되었지만 자트족 방화범은 아무도 체포된 사람이 없어서 달리트들은 더욱 분노하고 있었다. 달리트들은 도로를 점거하는 등 강력하게 의사표시를 했고 정부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복구비를 지원해서 불에 탄 집들을 재건하고 있었다. 일요일 취재 중에 이 지역의 부군수가 현장시찰을 위해 방문했다. 니어자라는 이름의 20대 후반 젊은 여자 부군수는 자신이 고등고시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 했다. 니어자는 영국에도 왕실이 있고, 귀족이 있듯이 계급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카스트제도와 달리트는 인도의 문화현상이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극복될 것이라고 했다. 또 인도가 앞으로 발전하는데 이런 것들이 절대로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트건 아니건 많은 인권운동가들은 달리트의 존재는 인도 발전의 장애물이라고 주장했다.
출생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고, 그것으로 인해 평생을 어떻게 살지 결정된다는 것은 인권에 반하는 불공평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수 천년에 걸쳐 이루어졌고 더구나 종교와 결합되어 있다면 쉽게 변하지 않을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불가촉천민제도는 21세기 수퍼 파워로 거듭나려는 인도가 넘어야 할 벽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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